인간의 숙명 - 울산 변호사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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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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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숙명 - 울산 변호사 이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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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나라 제1의 부자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오늘 출근하고 나서 아침에 헐레벌떡 급한 일을 처리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콩나물 국밥집 6천원하는 비빔밥을 시켜 반정도 먹고 대공원 호숫가를 혼자 산책하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몇 년 전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2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친분이 있었던 모 변호사가 암에 걸려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몇 년 전 울산에 재판 온 다른 변호사가 일부러 내 사무실에 들러 알려준 일이 있었다. 얼마 뒤 서울에 볼일 보러 가는 길에 병원에 들렀더니 호흡기를 달고 목에는 구멍이 뚫려서 식도로 음식을 주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한마디 듣지 못하고 손만 한번 꽉 잡아보고 돌아왔다. 그 변호사는 정말 똑똑한 변호사였다. 소송 과정에서 누구보다 집요하였고 승소에 집착하였으며 돈도 잘 벌었고 이재에도 밝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변호사가 소송 과정에서 승소를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과 재판정에서 열정적이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변호사로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변호사는 건강만큼은 무신경하였다. 5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이미 어금니 모두가 빠져 임플란트 할 위아래 어금니 자리에 구멍까지 모두 뚫어놓고도 당뇨로 인하여 시술을 못하고 있을 정도였음에도 아침은 쓰디 쓴 커피 한잔, 점심은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면, 저녁은 자기 집 앞 조그만 카페에서 작은 맥주병으로 10병 가까이를 식사 대신 비우고 나서야 귀가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던 당시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독하디 독한 말보로 담배도 하루 두,세갑은 기본이었다. 운동은 전혀 하는 기색이 없었고, 주말에 어쩌다 골프를 쳐도 카트를 타고 다니기가 일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50대 초반의 나이라서 당뇨가 있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60대 초반에 여러 군데 암이 찾아와서 결국 65세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 사람의 마음이나 생활태도가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이 아침에 식사를 못한 것은 전날의 숙취 때문이고, 점심때 면을 시킨 것은 이가 성하지 못해서이고, 저녁에 술로 식사를 때운 것도 이가 성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장기간의 음주로 인하여 인이 박혀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승소에 집착한 만큼 승소하고 나서도 그만큼 허무도 크게 찾아왔을 것이고, 패배했을 때는 노력한 이상으로 우울감과 패배감이 그를 엄습하였을 것이다. 그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달래며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영원히 살 것처럼 유달리 성취에 집중하였지만 작은 전투 뒤에 찾아오는 허무와 우울에는 사실상 패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허무와 우울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희생한 결과가 가슴 아플 뿐이다. 어찌보면 그에게는 성취가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의 탁원한 자질과 부드러운 심성을 아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간혹 살아가면서 성취를 이루었더라도 인생이라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작은 전투에서 이긴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가오는 허무나 우울의 정도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뉴턴의 운동 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죽는 순간까지 시지프스의 저주를 면하지 못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바위를 올리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더라도 또 다시 바위는 산아래로 굴러가게 되어 있음에도 신이 죽음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숨을 가져가기 전까지는 시지프스는 반복해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저주 속에서 매일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지프스는 살아있는 한 그 저주를 자신의 손으로 풀 방법이 없고, 풀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시지프스는 우울증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다만 정상으로 밀어 올린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가는 순간부터 시지프스는 굴러 내려가는 바위를 바라보며 정상으로부터 터덜터덜 다시 바위가 멈춰질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며 그 짧은 시간동안 잠시 쉼을 얻을 수밖에...
변호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작은 전투이다. 그러나 그 전투가 승리로 끝나더라도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와 다른 전투를 또 준비해야한다. 전투에서 이겨 전리품을 얻더라도 그때 뿐,.. 다시 변호사는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해야한다. 이겼을 때도 또 다른 전투를 앞두고 지겨움과 막막함에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고, 졌을 때는 패배감과 좌절감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 힘을 내어 그래도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게 매일의 삶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변호사들은 그 고통과 허무를 이기기 위해 때로는 술로, 담배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우울증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니 허무와 우울은 변호사의 가장 큰 적이다.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좋지 못한 세레머니로 자신의 몸을 망치게 하며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욕구에 쉽게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변호사의 바위는 변호사가 밀어 올려야 한다.
그 젊은 재벌은 무엇이 그토록 자기 자신을 우울하게 했을까. 나는 상상조차 못하는 그 나름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젊은 재벌이 밀어 올리기 힘에 부쳤던 바위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다른 선택은 없었을지 아쉽다.
그 젊은 재벌의 나이가 내 나이고, 그 먼저 간 변호사가 그나마 생전에 건강했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 때였다.
인간은 어차피 신에, 자연에 맞서 언젠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하는 숙명적인 존재이긴 하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뻔히 알면서도 또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일까? 가난도 바위이고, 우울증도 바위이고, 술과 담배도 바위이고, 삶의 구비마다 등장하는 모든 난제들이 모두 바위겠지. 그런데 어차피 다시 산아래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신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날까지 저마다 시지프스인 우리는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우리의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신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 순간이 되어야 비로소 전쟁은 끝나게 되는 것일까? 어차피 지는 전쟁을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맞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젊은 재벌도 이런 고민을 하며 몇날 몇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날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나에게도 우울과 허무가 엄습할 때 어떤 자세로 나는 우울과 허무를 맞이할 것이며 정 견디기 힘들 때라면 어떤 방식으로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취할 현명한 방법일까 산책하는 내내 고민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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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나라 제1의 부자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오늘 출근하고 나서 아침에 헐레벌떡 급한 일을 처리하고 늦은 점심식사를 콩나물 국밥집 6천원하는 비빔밥을 시켜 반정도 먹고 대공원 호숫가를 혼자 산책하다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몇 년 전 일을 회상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2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친분이 있었던 모 변호사가 암에 걸려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몇 년 전 울산에 재판 온 다른 변호사가 일부러 내 사무실에 들러 알려준 일이 있었다. 얼마 뒤 서울에 볼일 보러 가는 길에 병원에 들렀더니 호흡기를 달고 목에는 구멍이 뚫려서 식도로 음식을 주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한마디 듣지 못하고 손만 한번 꽉 잡아보고 돌아왔다. 그 변호사는 정말 똑똑한 변호사였다. 소송 과정에서 누구보다 집요하였고 승소에 집착하였으며 돈도 잘 벌었고 이재에도 밝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변호사가 소송 과정에서 승소를 위해 무던히 노력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과 재판정에서 열정적이던 모습을 기억하면서 변호사로서 닮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곤 한다.
그러나 그 변호사는 건강만큼은 무신경하였다. 50대 초반의 나이임에도 이미 어금니 모두가 빠져 임플란트 할 위아래 어금니 자리에 구멍까지 모두 뚫어놓고도 당뇨로 인하여 시술을 못하고 있을 정도였음에도 아침은 쓰디 쓴 커피 한잔, 점심은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면, 저녁은 자기 집 앞 조그만 카페에서 작은 맥주병으로 10병 가까이를 식사 대신 비우고 나서야 귀가하는 매일을 보내고 있었던 당시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독하디 독한 말보로 담배도 하루 두,세갑은 기본이었다. 운동은 전혀 하는 기색이 없었고, 주말에 어쩌다 골프를 쳐도 카트를 타고 다니기가 일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50대 초반의 나이라서 당뇨가 있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60대 초반에 여러 군데 암이 찾아와서 결국 65세를 넘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 사람의 마음이나 생활태도가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이 아침에 식사를 못한 것은 전날의 숙취 때문이고, 점심때 면을 시킨 것은 이가 성하지 못해서이고, 저녁에 술로 식사를 때운 것도 이가 성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장기간의 음주로 인하여 인이 박혀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승소에 집착한 만큼 승소하고 나서도 그만큼 허무도 크게 찾아왔을 것이고, 패배했을 때는 노력한 이상으로 우울감과 패배감이 그를 엄습하였을 것이다. 그는 술과 담배로 자신을 달래며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은 영원히 살 것처럼 열심히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영원히 살 것처럼 유달리 성취에 집중하였지만 작은 전투 뒤에 찾아오는 허무와 우울에는 사실상 패배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허무와 우울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희생한 결과가 가슴 아플 뿐이다. 어찌보면 그에게는 성취가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의 탁원한 자질과 부드러운 심성을 아는 나로서는 개인적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간혹 살아가면서 성취를 이루었더라도 인생이라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작은 전투에서 이긴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가오는 허무나 우울의 정도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뉴턴의 운동 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처럼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죽는 순간까지 시지프스의 저주를 면하지 못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정상으로 바위를 올리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더라도 또 다시 바위는 산아래로 굴러가게 되어 있음에도 신이 죽음이라는 최후의 수단으로 숨을 가져가기 전까지는 시지프스는 반복해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저주 속에서 매일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지프스는 살아있는 한 그 저주를 자신의 손으로 풀 방법이 없고, 풀어서도 안된다. 그렇다고 시지프스는 우울증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다만 정상으로 밀어 올린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가는 순간부터 시지프스는 굴러 내려가는 바위를 바라보며 정상으로부터 터덜터덜 다시 바위가 멈춰질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며 그 짧은 시간동안 잠시 쉼을 얻을 수밖에...
변호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작은 전투이다. 그러나 그 전투가 승리로 끝나더라도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와 다른 전투를 또 준비해야한다. 전투에서 이겨 전리품을 얻더라도 그때 뿐,.. 다시 변호사는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해야한다. 이겼을 때도 또 다른 전투를 앞두고 지겨움과 막막함에 한숨을 지을 수밖에 없고, 졌을 때는 패배감과 좌절감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 힘을 내어 그래도 또 다른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게 매일의 삶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변호사들은 그 고통과 허무를 이기기 위해 때로는 술로, 담배로 자신을 위로하거나 우울증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니 허무와 우울은 변호사의 가장 큰 적이다.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좋지 못한 세레머니로 자신의 몸을 망치게 하며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은 욕구에 쉽게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변호사의 바위는 변호사가 밀어 올려야 한다.
그 젊은 재벌은 무엇이 그토록 자기 자신을 우울하게 했을까. 나는 상상조차 못하는 그 나름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젊은 재벌이 밀어 올리기 힘에 부쳤던 바위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다른 선택은 없었을지 아쉽다.
그 젊은 재벌의 나이가 내 나이고, 그 먼저 간 변호사가 그나마 생전에 건강했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나이가 지금의 내 나이 때였다.
인간은 어차피 신에, 자연에 맞서 언젠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하는 숙명적인 존재이긴 하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뻔히 알면서도 또 다시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일까? 가난도 바위이고, 우울증도 바위이고, 술과 담배도 바위이고, 삶의 구비마다 등장하는 모든 난제들이 모두 바위겠지. 그런데 어차피 다시 산아래로 굴러 떨어지더라도 신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날까지 저마다 시지프스인 우리는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우리의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가 신이 우리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 순간이 되어야 비로소 전쟁은 끝나게 되는 것일까? 어차피 지는 전쟁을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끝까지 맞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젊은 재벌도 이런 고민을 하며 몇날 몇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날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나에게도 우울과 허무가 엄습할 때 어떤 자세로 나는 우울과 허무를 맞이할 것이며 정 견디기 힘들 때라면 어떤 방식으로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서 취할 현명한 방법일까 산책하는 내내 고민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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